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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치 1등들의 특징

by 눈떠베 2023. 7. 22.

호치민시 한국어말하기대회

대학부 한국어 말하기 대회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대학부에 앞서 중고등부 예선전이 오늘 있다고 해서 아침 일찍 대회가 열리는 호치민 한국국제학교에 갔다. 그랩 아저씨는 나를 학교 앞에 내려주고는 “Hàn quốc(한국) trường học(학교)” 하면서 마구마구 손가락 따봉을 해 주었지만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저씨, 이 학교 제 학교 아니에요 :-(’

 

 

같은 학과 교수님들도 때마침 도착해서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고 함께 대회장에 들어갔다. 동료 교수님들은 지도 학생이 있거나 심사위원으로 참가를 한 것인데, 나는 한 달 뒤 내 지도 학생이 발표할 무대를 미리 보고 무대 동선과 심사위원과의 구도, 무대를 얼마나 넓게 쓸 수 있는지, 얼마만큼 자유롭게 퍼포먼스를 할 수 있는지 등을 미리 검토하려고 방문하였다. 지도받는 학생도 옆자리에 앉아 중고등부 학생들이 스피치 하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사물놀이 축하 공연

소개하고 싶은 베트남 문화

국제학교 홍보 영상과 학생들의 축하공연이 이어지고 이윽고 본격적인 대회가 시작되었다. 44명의 학생들이 3분씩 스피치를 하였다. 주제는 한국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베트남의 문화였는데, ‘아오자이, 설날, 수상시장, 민속음악, 축제, 반쎄오, 반미같은 예측 가능한 주제부터 베트남 여성들의 오토바이 의상, 로또 같은 생각지 못한 주제도 학생들은 발랄하게 발표했다. 특히 베트남 여성들이 자외선에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모자, 선글라스, 마스크, 장갑, 앞치마 등을 착용하고 운전하는 모습을 무대 위에서 실감 나게 재현한 학생과 실제 로또 종이를 만들어 와 청중을 대상으로 추첨을 진행해 버리는 학생을 보면서는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베트남 로또를 주제로 발표한 학생의 소품

스피치 1등들의 특징

스피치에서 1등을 하는 학생들은 무대 위에 올라갈 때 여유가 넘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준비 엄청 많이 했거든요. 어서 무대 위에서 나를 보여 주고 싶어서 미치겠어요.’

 

하는 분위기가 제스처와 표정에서 여유로 묻어난다. 스피치도 일종의 쇼이기 때문에 기세가 중요하다. 불안하고 초조해하기 시작하면 준비과정에서 부족했던 부분들이 자꾸 떠올라 더욱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연습이 충분했고, 그 시간에 바탕한 긍정적이고 자신 있는 기세는 발표 전부터 주변에 퍼져 기대의 시선을 모은다. 짐승 같은 인간은 그 기운을 귀신처럼 포착해내므로 발표자는 더욱 자신감이 생기고 자기 믿음이 생긴다. 오토바이 의상을 주제로 발표했던 그 학생이 그랬다. 대기 좌석에서부터 무대는 쳐다보지도 않고 본인이 보여 줄 퍼포먼스 준비에 집중하는데 표정에 얼마나 힘이 담겨있었는지 모른다. 무대에 올라갈 때도 긴장보다는 오히려 그 상황에 희열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청중은 말하지 않았지만 그 학생이 궁금하고 어쩐지 잘해낼 것 같다는 기대를 하게 된다.

오토바이를 타는 베트남 여성들의 의상을 직접 입고 무대에 오른 학생

대사를 잊어버리면 어떡하지? 실수를 하면 어떡하지? 시간을 초과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에 집중하기보다 숨죽인 객석과 넓은 무대와 조명과 본인에게 집중된 그 시선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온전히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친구는 아마 연습하는 과정에서 이 모든 것을 상상하고 미리 몸으로 느끼면서 본인한테 집중하는 훈련을 했을 것이다. 이미지 트레이닝을 통해 훈련하지 않은 사람은 당시의 분위기에, 환경에, 사람에, 주변의 시선에 압도되어 버린다. 그래서 한 번 실수를 하면 주어진 그 3분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무대에서 내려와 버리고 마는 것이다. 첫 번째 발표한 학생이 대사를 잊어버렸다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57초만에 무대에서 스스로 내려와 버렸고, 다섯 번째 발표했던 학생도 중간에 잊어버려서 3분 중 반에 해당하는 130초를 남겨놓고 마이크를 놓아버리고 말았다.

 

주어진 무대와 시간 앞에서 도망치지 말 것

중간에 대사를 잊어버리거나 준비한 소품을 떨어뜨리거나 해도 누구도 제지하거나 돕지 않는 이유는 지켜주기 위함이다. 학생이 본인에게 주어진 무대와 시간을 오롯이 책임질 수 있는 기회를 망치지 않기 위한 것이다. 대회이지만 이 무대조차도 앞으로 살면서 닥칠 많은 인생의 사건들에 대한 훈련이기 때문이다. 도망치지 않고 스스로 그 시간을 책임지고 겪어낼 수 있는 태도와 마음가짐을 기를 수 있는 훈련 말이다.

 

지도 학생과 나는 대회가 끝난 후 대회를 본 소감을 공유했고, 대회 중간중간 찍어놓은 장면들을 함께 보면서 하지 말아야 할 것차용해야 할 것들을 복기하였다. 대회에서 입을 의상과 사용할 소품들에 대해 논의했고,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즐거운 경험이 될 것 같다고 서로를 응원했다. 어쩐지 살면서 배워야 할 뜻밖의 도리들을 한국에서보다 낯선 이 땅에서 더 많이 배우고 있는 느낌이다.